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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부록 ③ 스크라, 마릭카, 위지라트네

 

 

  제 6 화  전생의 남편을 섬기는 스크라
  
  캘커타에서 약 60Km 떨어져서 캄바라는 마을이 있다.  스크라는 1954년 3월에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겨우 한살 반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다가 목침만한 나무토막을 집어서 껴안고는  "미누, 미누" 하며 마치 아기를 달래듯 어루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녀는 베개나나무토막을 보면 꼭 그것을 껴안고  "미누, 미누" 하였다. 그러더니 차츰 말을 익히게 되자 전생의 일을 자세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바트파라 마을의 라사라라는 지역에서  '그 사람'과  케토우,카르나와 함께 살았으며 미누라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과함께 영화구경을 갔다 오는 길에  맛있는  요리를 먹은 이야기도 했다.그러더니 아버지에게 바트파라에 데리고 가 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어떤 때는 "혼자서도 갈수 있다. 길을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크라의 아버지 K. N. 센 구프라는 철도원이어서 딸아이가 이야기하는 바트파라를 열차를 타고 자나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캘커타에 가는도중에 있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그는 바트파라가 실제로 있는 줄은 알고 있었다. 그는 바트파라 가까이에 사는 직장 동료인 파르에게 스크라가 하는 말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파르는 바트파라 마을에 그의 친척이있다고 하면서 라사라라는 지역이 있는지 또 케토우라는 사람이 있는지알아봐 주겠다고 하였다. 얼마 후에 파르의 회답을 받고 구프라는 스크라를 데리고 바트파라에 가기로결심했다. 그 회답은 이러했다.
  "바트파라 마을에는 분명히 케토우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조카 중에는 미누라는 아이가 있다.  미누의 어머니 마나는 아이가 어렸을 때 죽었다. 1948년 1월의 일이다.  그 집 주인은 아므리타랄 차크라바트리라고 하는 바라문계급이다."
  이 회답의 내용에 따라 스크라를 미누의 어머니로 가정해 보면 꼭 들어맞는 것이다.
  이리하여 스크라가 다섯살이 되던 1959년 여름에 파르의 친척이 주선을 하여 바트파라에 가게 되었다. 그 사실을 차크라바트리 가에도 알렸다. 스크라의 아버지 구프타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서 스크라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교차로가 많고 사잇길이 많아 복잡한 길인데도 조금도헤매는 기색이 없이 전생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 앞에서는 마나의 시아버지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미누의 삼촌인 케토우와 카르나도 알아보았다. 딸 미누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축제용 수레인 라스를 넣어두는 건물이 있는 것도 지적해냈다.  라스를두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라사라'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스크라의 전생기억에서 특이한 점은,  결혼하여 지낸 수년 동안을 제외하고는,  마나가 그 생애의 대부분을 함께 보낸 친정 식구들을 거의 아무도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가족은 물론이고 그 집을 방문하여서도 물건을알아보지 못했다.
  이 첫방문 이후에도 스크라는 바트파라 마을을 자주 방문하였고,  그녀의 전생기억도 많이 나타났다.  한번은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면서 그것을 만들어달라고 자기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리고 식사 때에마나의 남편인 하리단과 함께 먹게 되면 언제나 그가 남긴 것을 그대로먹곤 했다.  인도에서는 아내가 남편이 먹고 남은 음식을 먹는 것이 부부간의 정법(定法)인 것이다. 스크라의, 딸 미누에게 대한 애정은 무척커서 미누가 아프다는 말만 듣고서도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와했다. 또 스크라는 많은 옷을 넣어둔 옷상자 속에서 마나가사용하던 세 벌의 옷을 골라내었다.   마나가 쓰던 재봉틀을 보자 반가운듯이 만지며 눈물을 머금었다. 그 재봉틀은 마나 생전에 열심히 일하던 것이다.
  스크라의 전생기억은 세살에서 일곱살 사이에  가장 또렷하였고,  그이후로는 차츰 희미해져갔다. 전생기억이 흐려짐에 따라서 하리단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도 차츰 냉담해졌다. 그래서 그녀가 열두살쯤 될 때까지는 하리단의 방문을 환영했었다. 그러다가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어린소녀가 전생의 남편이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열다섯살때에는 재혼한 하리단이  그의 아내와 함께 왔다 간 뒤에 "저 사람들이자꾸 가까이 오는 것이 싫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열일곱살이 되자전생 기억을 상실한 것 같다고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말하고 있다.

  
  제 7 화  전생의 가정에 애착을 가진 마릭카
  
  인도의 베로레 시(市)에 살던 '데비'라는 처녀는  1949년 장티푸스로사망했다.  그녀의 언니 곧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는 남편과 함께 폰테이세리에 살고 있었다.   모우로가시가마니 가(家)에서는 1956년 7월집의 아랫층을 세를 놓았다.  이 일층에 세든 사람은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친척으로 그 집에는 1955년 12월 4일생인 딸 마릭카가 있었다.
  마릭카는 자라면서 윗층의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에게 강한 애착을보이게 되었다.  그녀가 네살이 채 되기 전에, 처음으로 윗층의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집에 놀러왔다가 거기서 의자위에 있는 수놓은 쿳션을 보더니, 그것을 가리키며,  "이건 내가 만들었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는,  그것은 여동생인  데비가 만든 것이기 때문에,  "10년도 더 전에 죽은 여자가 만든 거야"라고  그녀에게 일러주었다. 그러자 마릭카는 고개를 저으며  "그 여자가 바로 나야"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또 그녀는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에게 처음에는 '언니'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동생의 죽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우가시가마니의 아내는 "아주머니라고 불러라" 하고 마릭카에게 가르쳐 주었다.마릭카는 이 '언니'에 대한 애착이 더욱 강해지고 기회만 있으면 '윗층집'에 올라와 놀면서 될 수 있는한 많은 시간을 이 '언니'와 함께 있으려고했다.
  이 '언니'는 마릭카의 행동이나 태도에서 죽은 데비와의 유사점을 많이 발견했다.  목욕하는 방법이나 당황했을 때의 몸짓같은 것도 닮았으며, 남의 앞에서 좀 거만하게 걷는 걸음걸이도 닮았다. 또 마릭카의 카레 요리 솜씨는 나이에 견주어 꽤 상당한 솜씨인 것 같았다.
  마릭카가 자기의 전생이 데비였노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지 얼마 뒤에'언니'는 그녀를 베로레 시에 있는,  자기의  오빠가 살고 있는 집으로데리고 갔다.   이 집에서 커다란 사진 앞에 가서는 "나의 부모야"라고했다.  그것은 분명히 데비의 부모 사진이었다. 집안 식구의 사진을 보여주니까 그녀는 이집 주인인 오빠를 가리키며  "이건 나의 오빠야, 그렇지만 지금은 집에 없어"라고 말했다.  실제로 데비의 오빠는 이때 직장 관계로 먼 곳에 있었다. 얼마 후 마릭카는 데비의 오빠와 만났을 때에도 이 사람을 바로 '오빠'라고 알아보고서 '언니'와 마찬가지로 강한애정을 보였다.
  마릭카에게 있어 데비로서의 전생기억은 한 가지뿐이었다. 어느날 마릭카가 있는 자리에서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끼리  우연히 소에 대한말이 나왔다. 그러자 마릭카는, "나는 '카운다비'의 일을 기억한다. 그리고 카운다비의 젖을  송아지처럼 빨던 강아지도 기억한다"고  말하는것이었다. 데비가 살았을때 그녀는 한 마리의 암소에게 '카운다비'라는인도 왕자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그러나 이 소는 마릭카가 태어나기훨씬전에 죽고 없었다.  또 마릭카가 말한 강아지는 카운다비가 새끼를낳고 난 뒤에 그 젖을 빨아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은  이 소와 개의 이야기를  마릭카에게 한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마릭카의 모우로가시가마니 가(家)에 대한 애착은 대여섯살이 되어도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 가족에 대한 것보다도 더 강한 애착을 갖는 것 같았다.  또한 자신의 부모에게는 전생에 대한 애기를 하지 않았다.  언제나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들 앞에서만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데비의 형제, 자매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였다.
  마릭카의 사례에서는 그녀의 집이  '언니'가 살고 있는 한 건물 안으로 이사를 했다는 이상한 우연성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데비의 생애에대한 그녀의 기억은 어떤 자극 요인이 있을 때에만 의식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제 8 화  형의 아들로 환생한 위지라트네
  
  이 이야기는 1947년 1월 스리랑카의 무갈칼토타에 태어난 위지라트네의 이야기이다.  그의 부모는 결혼 후 10여년이 지나서 이 아이를 낳았다. 이미 몇 아이를 기른 후였지만 이런 모습의 아이는 처음이었다. 그는 태어나면서 왼쪽 가슴에 둥글게 패인곳이 있고, 또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은 손바닥에서 잘 벌어지지 않으며  다른 네개의 손가락은 마치 선인장처럼 손바닥 끝에 왼손 손가락의 첫째 관절 정도의 길이로 나와 있을 뿐이어서,  네개의 손가락은 마치 손바닥의 연장인 것처럼 달라붙어있었다. 스리랑카는 전통적인 불교국가이기 때문에 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타고 난 선천적인 불구자는 전생에서 한 행위의 업보를 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아이가 두살이 좀 지났을 때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자기의 손이 이처럼 조막손인 것은 전생에  아내를 죽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어린 아들의 이 중얼거림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남편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그러자 남편은 그 말이 맞는 말일 것이라고하는 것이었다. 20년 전에 그의 동생이 살인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는데,그 때 동생 하미가  자기는 죽어서  형님 댁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라고말했다는 것이다.
  라트란 하미는  자기 아내인 포디 메니케를 살해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스리랑카의 결혼 풍습은 두 단계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법률적으로 결혼해서  부부가 되고  다음에 혼례식을 올려 완전한 부부가되는 것이다. 그런데 법률적으로 부부가 되어도 몇 달 동안은 친정에서그대로 지내다가  뒤에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남편의 집으로 가면 완전한 부부가 되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에  라트란 하미와 포디메니케는 법률적 부부관계였다.
  1927년 10월 14일  하미는 관례대로 정식 혼례를 치루기 위해 아내를데리러 처가집에 갔다.  하미는 기쁜 목소리로 메니케를 불렀지만 메니케는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가 대신 인사를 하였는데 하미는 혼례식을 앞둔 말쑥한 신랑 차림으로 서 있었다.   장모와같이 들어온 하미는 아내인 메니케가 밥을 먹고 있는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건넸으나 메니케는 여전히 묵묵무답이었다. 게다가 메니케는 하미와 같이 가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둘 사이에큰 소리로 말다툼이 벌어지고 하미는 흥분한 채로 그 집을 뛰쳐 나오고말았다.  그리고 점심 때가 못 되어서 하미는 다시 메니케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메니케의 집으로 들어온 하미는 방으로 들어가 갑자기 메니케의 등을 칼로 찔렀다. 메니케가 지르는 비명소리에 온 집안은 수라장이 되었고 하미는 도망치는 메니케의 뒤를 쫓아가서  다시 크리스 칼을휘둘렀다.  그 때 누군가가 하미를 때려눕히고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으나 이미 메니케는 숨을 거둔 뒤였다.
  행복한 삶을 시작하기로 한 날에,  그와 정반대로, 두 사람은 비극의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미는 이 사건으로 기소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1928년 7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47년,하미의 형 집에 위지라트네라는 소년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고는 그 스스로가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실은 나의 전생의 형이다. 나는 전생에서는 라트란 하미였고  옷갈칼토타 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다."그리고 사형당하던 그때의 상황을  위지라트네는  전생기억에서 이렇게말했다.
  "교수형이 행해지기 직전에 나를 위해 한 스님이 최후의 독경을 행하였다. 검은 헝겊이 머리에 씌어졌다. 트랩이 빗겨졌다. 나는 형의 일만생각했다. 그리고 목이 조이는 것을 느끼고 불이 타오르는 도가니 속으로 떨어져 간다는 느낌이 되었다."
  위지라트네가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후,  그가 네다섯살이 되었을 때에, 콜롬보대학 교수가 이 사례를 처음으로 조사했다. 그 뒤에 행한 이안 스티븐슨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많은 부분이 당시의 재판기록과 일치했으며 어떤 부분은 재판기록에는 빠진 것도 있었다고 하였다.
  하미의 결혼관계에 대해 재판 기록에는 미혼(未婚)이라고 되어 있다.위자라트네 자신의 전생기억에 의하면  '하미'는 메니케에 앞서 아내가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첫아내는 병으로 죽었는데 이 일이 하미의 불행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메니케의 살해사건을 재판기록에서 찾아보자.   '일단 메니케의 집을사건 당일 뛰쳐나온 하미는 얼마 후 크리스를 들고 다시 되돌아가서 메니케를 죽였다'는 것이 재판에서의 사실인정이다. 이 부분에 대한 위지라네트의 전생기억은 다음과 같다.
  "메니케는 모하티하미라는 남자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모하티하미는 메니케가 전생의 나,  곧, 라트란 하미와의 결혼을 거부하도록 그녀를 설득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메니케의 집에서는  그날 아침 식사준비가 되어 있어서 뭔가가 끓고있었다."
  "결혼 최종 단계가 되었기 때문에  나(라트란 하미)는 메니케의 집에가서 함께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자 메니케는 거부했다."
  "아내가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걸어서 5마일 떨어진  우리 마을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는 오렌지나무 아래의 두꺼운 판자 위에서  크리스를 갈았다."
  "메니케를 설득시키지 못하였고 또 메니케의 집에서 나의 경쟁자라고생각하던 사나이를 보았기 때문에 메니케를 찔렀다."
  이상의 전생 발언은 현실의 재판에서의 범인의 진술처럼 현장감이 있다.  당시에 크리스를 갈던 오렌지나무 아래의 두꺼운 판자는 그 뒤 몇십년이 지나도 그냥 그대로 있었다.  위지라트네가 현세의 가족들을 데리고 가서 그것을 가리켜 보였다고 한다.
  또 재판기록에 의하면 하미는 "나는 모하티하미에게 얻어맞고 쓰러져체포되었다. 그래서 나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크리스를 휘둘렀다. 애초부터 살인할 의도는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재판에서는 고의의살인이라고 인정되어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여기에 대해 위자라트네의전생 발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메니케가  나의 집에 오기를 거부했을 때  죽이기로 결심했다.그러니까 처음부터 죽일 생각을 가지고 죽였다."
  "모하티하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죽인 것을메니케 집의 가정부에게 들켜서 그것은 허사가 되었다."
  "죽이고 난 뒤에 모하마티하미에게 얻어맞고 쓰러졌다."
  이 세 가지의 전생 발언은 앞서 말한 "크리스를 갈았다"고 한 발언과마찬가지로 재판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재판 기록에만 의지해서 그것의 사실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형이 선고되고 사형집행까지의 한달 동안을  하미는 감옥에서 어떻게 지냈는가? 하미의 사형 집행 며칠 전, 형 티레라트네가 주선하여 부처님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법회가  십여 명의 스님들에 의해서 하미가수감되어 있는 감방 앞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하미는 말했다.
  "형,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나는 형의 아들로 환생해서 다시올거야."
  이 '환생의 약속'은  위지라트네의 전생 발언에서도 확인되었다.  곧"사형집행 오일 전에  형이 형무소에서 나를 위해 거행해 준 법회가 있었다"고 하면서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했으며 법회에 참석한 스님 들의 이름까지도 말했다.
  한 스님에 의해 최후의 독경이 행해진 사실과 검은 헝겊을 머리에 씌운 것은 사형집행의 관례로 보아서 당시에도 그러했으리라.  그러나 목이 조여드는 느낌과 불타오르는 도가니 속으로  떨어져 가는 느낌 등은확인할 수 없다.
  위지라트네는 나중에는 전생의 일만이 아니고 죽은 뒤의 일까지도 기억해 내고 있다.   즉 영계(靈界)의 일이라든지 위지라트네로 태어나기전에 "새가 되어 살았다"라든지 하는 중간적 전생의 것들이다. 어느 것도 확인해 볼 수 없는 것들이지만 불교도들이 믿고 있는,  죄인은 인간보다 낮은 동물이 되어 환생 한다는 사고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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